어사 박문수 - 설화 전라도 덕유산 골짜기의 좁은 길을, 더러운 옷에 다 떨어진 갓을 쓴 한 나그네가 대 지팡이를 질질 끌며 가고 있었습니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동네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골짜기는 점점 더 험해지기만 하였습니다. 어느덧 해는 져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좀 쉬었다 가자." 나그네는 중얼거리며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지친 다리를 쉬었습니다. 이 때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가 반짝 빛났습니다. '웬 불빛일까?' 나그네는 숨을 죽이고 불빛이 반짝이는 곳을 따라 발길을 옮겨 놓았습니다. '아니, 사람이 사는 동네인가.' 동네였습니다. 그 곳에는 뜻밖에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라서 집집마다 문을 닫은 채 온 동네가 죽은 듯이 조용하였습니다. 나그네는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렸습니다. 그 때 어느 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나그네는 급히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이 놈아, 죽어라. 너는 죽어야 해!" 화가 잔뜩 난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곧 이어 젊은이가 죽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나그네는 하도 이상하여 문틈으로 방안을 가만히 엿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그네는 깜짝 놀랐습니다. 칼을 든 늙은이가 젊은이의 배 위에 올라앉아 찌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 놔두었다가는 큰일나겠다!' 나그네는 큰 기침을 한 번 하고 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여보시오, 주인 어른 계시오?" 그러자 늙은이는 얼른 칼을 감추고 문을 열었습니다. "뉘신지는 모르지만 들어오시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나그네는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죽여 달라던 젊은이는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이상하군.' 나그네는 늙은이와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주인 늙은이는 유안거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까 밖에서 듣자니까 댁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입니까?" 나그네가 묻자 주인은 한숨을 쉬며 말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서울에서 살다가 12년 전에 세 살 된 아들 하나를 데리고 이 덕유산 아래로 와서 살고 있소. 이곳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그럭저럭 살아 왔지요. 그런데 동네 이름까지 구천동이라고 할만큼 이 동네에는 온통 구씨와 천씨들만이 모여 산답니다. 그러니 우리같이 혼자 와서 사는 사람은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처지지요. 지금은 아들 득춘이가 장가들어 모두 네 식구입니다. 마침 이 동네에 천운서라는 사람도 아들을 장가 들였지요. 그런데 그 집 새 며느리가 행실이 나빠, 우리 아들 득춘이와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이 나질 않았겠습니까! 천운서는 분풀이로 내 아내와 내 며느리를 뺏어다가 자기 아내와 며느리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내일이 저희들 멋대로 결혼식을 올린다는 날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들과 아내를 죽이고 나도 죽을 생각이었죠. 아까 그 놈은 내 아들 득춘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나그네는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혼례식은 내일 몇 시에 올린답니까?" "오후 세 시에 올린답니다." "그럼, 여기서 제일 가까운 관청이 어디지요?" "70리를 가야 이 고을 관청이 있습니다." "주인장, 너무 걱정 마시오. 내 지금 나갔다가 기쁜 소식을 가지고 내일 세 시 전에 돌아올 테니 안심하시오." "손님 말씀만 믿고 있다가 분한 일을 당하면 어쩌고요?" "안심하고 기다리시오." "하지만 이 밤중에 어떻게 그 먼 길을 가시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나그네는 관청이 있다는 서남쪽으로 곧 길을 떠났습니다. 이 나그네가 유명한 어사 박문수입니다. 암행 어사란, 각 지방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잘 다스리는지 못 다스리는지, 형편을 몰래 살피는 관리입니다. 박어사는 천운서의 옳지 못한 행실을 괘씸하게 여기며 밤길 70리를 단숨에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튿날 무주 읍에 닿아 '암행 어사 출두'를 붙였습니다. 어디든지 암행 어사가 나타나면 그 고을 원은 꼼짝하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입니다. 어느 새 역에 딸린 군졸들이 관원을 호령하여 박어사를 모셔들였습니다. 박어사는 우선 관원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 고을의 광대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광대 중에서도 특히 땅재주를 잘 넘고 기운이 센 광대 네 명을 골랐습니다. 박어사는 원에게 그림을 그려 주며 그림과 똑같은 군복 다섯 벌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또 빛깔을 달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복이 만들어졌습니다. 박어사는 원에게 인사 한 뒤, 군복을 가지고 네 명의 광대와 함께 덕유산 골짜기로 갔습니다. 유안거는 큰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윽고 천운서는 혼례식에 쓸 옷과 그릇을 자기 집에서 가져다가 유안거네 집에 놓았습니다. 점심때가 되자, 천운서는 식구들을 데려왔습니다. 드디어 혼례 시간이 가까워왔습니다. 천운서 부자는 신랑 차림으로 식장에 나왔습니다. 이를 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천운서 부자를 욕했습니다. 이제 신부가 나와 절만 하면 혼례식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때, 갑자기 구경꾼들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습니다. 그러더니 누런 갑옷에 누런 투구를 쓴 한 장군이 마당 한복판으로 썩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장군은 한 손에 누런 그림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또 한 손에는 누런 방망이를 힘차게 잡고 있었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경꾼들을 새파랗게 질려서 옴쭉달싹 못 하고 있었습니다. 장군은 누런 방망이로 혼례상을 꽝 치며 소리쳤습니다. "동방 청제 대장군 나오라!" 그러자 공중에서 '예에이' 하는 소리와 함께 장군 하나가 '쿵' 내려왔습니다. 청제 장군은 푸른 옷에 용을 그린 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서방 백제 장군 나오라!" 이번에는 흰 옷을 입고 호랑이를 그린 기를 든 장군이 나타났습니다. "남방 적제 장군 나오라!"